Yeshua Literal Version

왜 직역인가

예슈아직역(YLV)은 히브리어 원전을 한국어로 옮기되, 전통 번역이 매끄러움을 위해 다듬어 온 두 가지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첫째는 대명사의 성(性)이고, 둘째는 신성형(神聖形)의 구분입니다. 이 두 가지를 살린 번역은 낯섭니다. 그 낯섦이 결함인지 회복인지 — 그것이 이 글에서 다루려는 질문입니다.

두 가지 견해

이런 번역을 두고 흔히 두 가지 평가가 갈립니다.

한쪽은 말합니다 — "언어를 모르는 단순한 직역이다."

히브리어의 문법적 성은 그 사물에 실제 성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어 체계의 약속일 뿐이며, 대명사가 여성형인 것은 선행사와의 문법적 일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어는 무생물에 성별 대명사를 쓰지 않으므로, 방주를 "그녀"로, 땅을 "그녀"로 옮기면 원문에 없던 의미가 새로 생겨난다 — 이는 두 언어의 차이를 모르는 처리라는 비판입니다.

다른 한쪽은 말합니다 — "원전이 살아난다."

형태론적 일치라 해도 그 글자는 본문에 실재하는 정보이며, 번역이 그것을 지우면 독자는 원문에 있던 구분을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단순한 일치이고 어디부터가 의미 있는 지시인지를 번역자가 미리 판단해 지워 버리면, 그 판단 자체가 이미 해석의 주입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입장에 섭니다. 그러나 단순히 "글자를 지키자"는 고집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 자체가 성(性)을 의미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性)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다

첫 번째 견해는 "문법적 성은 의미 없는 약속"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그 전제가 너무 성급한 일반화임이 드러납니다.

생명을 내는 것은 여성형입니다. 땅이 여성인 것은 땅이 생명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거기서 났고 거기로 돌아갑니다. 방주가 여성인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생명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고, 물을 통과하고, 새 세상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자궁이 생명을 품었다가 내어놓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인류의 언어가 보편적으로 "어머니 자연", "모국(母國)"이라 부르는 그 직관이, 히브리어의 성에 담겨 있습니다.

언약 관계는 혼인의 구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일관되게 신랑과 신부로 그립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라 하고, 배교를 간음으로 그립니다. 시온이 "딸 시온", "그녀"로 불리는 것은 임의가 아닙니다 — 시온은 신랑 앞의 신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이것을 완성합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시고, 성도들은 그분의 신부이며, 마지막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은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그 어린양은 신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신랑, 곧 메시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그 어린양을 "그것"이 아니라 "그를"이라는 남성 대명사로 가리킨 것은, 인격이신 메시아를 향한 지시입니다.

창조의 땅에서부터 새 예루살렘까지, 성(性)은 흩어진 우연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구조를 잇는 하나의 실(絲)입니다. 그것을 "의미 없는 일치"라며 지우면, 본문 전체에 짜인 이 실이 끊어집니다.

우리가 직역하는 두 가지

이런 까닭에 예슈아직역은 다음 두 가지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대명사의 성(性)을 살립니다

원문 대명사가 여성형이면 "그녀", 남성형이면 "그"로 옮깁니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오직 본문에 실재하는 글자 그 자체입니다. 어디까지가 의미인지를 우리가 미리 결정하지 않고, 본문이 둔 구분을 독자 앞에 그대로 펼칩니다.

신성형(神聖形)을 구분합니다

어떤 단어들은 형태만으로는 여성형처럼 보이지만, 본문이 그것을 받는 대명사와 동사를 통해 다르게 증언합니다. 약속된 씨(자라)는 끝에 헤(ה)가 붙었어도 그것을 받는 대명사가 남성이며, 본문은 그를 "그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라고 남성 인격으로 가리킵니다. 구원(예슈아)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여성형 대명사를 동반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여호와와 하나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단어 끝의 형태가 아니라 본문이 실제로 사용하는 증언을 따릅니다.

직역과 해석은 다릅니다. 직역은 본문이 둔 단서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둡니다. 해석은 그 단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풀어 줍니다. 이 둘은 역할이 다릅니다.

번역은 본문과 독자 사이에 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택한 것은, 무엇을 보여줄지 고르기보다 본문이 둔 것을 그대로 건네는 일입니다. 나머지는 읽는 이와 본문 사이에 남겨 둡니다.